강원도 온통 불 탔다

재난지역으로 선포해야 [권대정 기자 2019-04-05 오후 5:08:07 금요일] djk3545@empas.com
폐허가 돼 버린 강릉 옥계면 천남마을
2km 밖 산불이 30분도 안 돼 마을 덮쳐
"재산1호 ‘담배건조기’도 타버리고…
미처 못 데려 나온 ‘흑구’도 죽어버리고"

5일 오전 7시쯤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천남리 산자락에 있는 천남마을. 멀리서 본 마을에는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듯했다. 그러나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나무와 대문, 지붕, 전깃줄 등 가릴 것 없이 군데군데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에 도착하니 주민 20여 명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안 되겠어. 집에 가서 물 떠놓고 기다리자" "왜 소방차도 하나 안 오는 거야" "인천댁은 어쩌나. 홀라당 타버렸네"라며 다들 자기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주민 200여 명, 100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천남마을에는 지난밤 한바탕 ‘불난리’가 났다. 약 2km 떨어져 있는 남양리 야산에서 불이 나 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옮겨붙은 것이다.

5일 오전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천남마을에서 화재로 무너진 집을 바라보는 주민. /최상현 기자
고옥분(61)씨는 잿더미가 된 집 앞에 서서 멍하니 서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기둥밖에 남지 않았다. 지붕은 으스러져 뻥 뚫려 있고 집기는 뭐가 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모두 타 버렸다. 그는 "40년 동안 살아온 집인데… 아이고 담배건조기도 다 탔네"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 농사를 짓는 고씨에겐 싯가 2000만원 상당의 담배건조기 3대가 재산 1호였다.

고씨네 옆집 이웃은 전봇대에 목줄이 묶인 채 쓰러져 있는 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타버린 집보다 개를 미처 데리고 대피하지 못한 게 가슴 아파했다. 그는 "급하게 나오느라 ‘흑구’의 목줄을 풀어주는 걸 깜빡했다. 목이 깊게 패여 있는 것을 보니 뜨거워서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몸부림친 거 같다"고 했다.

주민 전영진(54)씨는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밤새 호스를 들고 집 주변에 붙은 불씨를 껐다"고 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마을회관에 대피 중이던 아내가 컵라면을 갖다주니 그제서야 "아이고 이제 좀 쉬어야 겠다"며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는 "농삿꾼에겐 집이 전부 아니냐. 정말 목숨 걸고 불을 껐다"고 했다.

전쟁터 같았던 지난 밤을 주민들은 이렇게 전했다. 남양리 쪽에서 불길이 치솟은 것은 전날 자정쯤. 마을 뒷산 봉우리 뒤로 마치 해가 뜨 듯이 시뻘건 화염이 올라왔다. 주민들은 하나둘 마을회관 앞으로 모였고, 한참을 뻔히 쳐다보면서 발만 동동 굴렀다. 30분쯤 지났을까, 바람이 거세지면서 불티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주민 김모(66)씨는 "하늘에서 빨간 불티가 비처럼 쏟아졌다"면서 "작은 것도 있고, 큰 것은 주먹만한 게 마구 날아 들었다"고 했다.

5일 새벽 산불이 발생한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의 한 가옥이 불에 타고 있다. /연합뉴스
그것도 잠시, 마을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이야~ 불이야~"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집으로 옮겨붙은 것이었다. 119에 신고했더니 소방차는 안 오고 소방대원 3~4명이 나와 주민들을 마을회관으로 대피시켰다. 주민들이 "불은 안 끄냐"고 물으니 "고성, 속초에 더 큰불이 나서 인력과 장비가 부족하다. 일단 대피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주민들은 밤새 마을회관에 잠 한숨 못 자고 마음을 졸였다. 주민 최석천씨는 "불길이 덮쳐 오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고 했다. 천남마을을 덮친 이날 불은 100km 가량 떨어져 있는 고성·속초 산불과는 별도로 발생한 화재인 것으로 소방당국은 보고 있다.

5일 오전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천남마을에서 화재로 무너진 집. /최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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