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도심 동물로[권대정 기자 2020-04-14 오후 12:14:27 화요일] djk3545@empas.com
일요일이었던 지난 12일 파리 남서쪽 교외 도시 ‘브와시-생-레제르’의 도심에 난데 없이 사슴 두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한 이동 금지령으로 인적이 드물어진 도심을 두 마리의 사슴은 유유히 돌아다녔습니다. 주민들의 스마트폰 카메라에 사슴들의 모습이 잡혀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근처 샤토(프랑스식 옛성)에서 키우는 사슴들인데, 대낮에 도심까지 ‘진출’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두 마리의 사슴은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고 조용히 샤토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슴이 나타난 브와시-생-레제르와 가까운 ‘샹피니-쉬르-마른’이라는 곳에는 그보다 이틀전인 지난 10일 도심에 얼룩말 한 마리와 조랑말 두 마리가 출몰했습니다. 이들 네발 동물 세 마리는 야심한 시각에 시내 한복판을 종횡무진했고,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폭소를 터트렸습니다. 지역 언론에 따르면 인근 서커스단 소속 동물들인데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뛰쳐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파리 근교 '샹피니-쉬르-마른'에 나타난 얼룩말/유튜브 캡처
3월 17일 시작된 프랑스의 이동 금지령은 적어도 5월 11일까지 최소 8주간 유지하기로 결정됐습니다. 사람과 차량이 사라지면서 동물과 새들이 점점 눈에 많이 띄고 있습니다. 지난 7일 기자가 에펠탑 남서쪽 방향에 있는 비르아켐 다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매로 보이는 초등학생 둘이 놀라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아, 저기 백조가 있어요. 백조.” 힐끗 보니 상류 방향으로 200m쯤 떨어진 수면 위에 새하얀 백조 한마리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센강에서 백조는 처음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파리 인근의 호수에서는 백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내의 센강 구간에서 백조를 본 건 파리 근무한 2년 사이 처음이었습니다.
센강에 나타난 백조/손진석 특파원
갑자기 센강에 백조가 나타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식 선에서 센강을 뒤덮다시피 하던 유람선이 이동 금지령에 따라 일제히 운항을 멈춘 것이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센강의 파리 시내 구간은 수많은 유람선이 일으키는 물결이 항시 일렁이기 때문에 가까이서 보면 정신이 어지럽습니다. 흙탕물이 쉼 없이 일렁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유람선이 자취를 감추면서 수면이 잔잔해진 나머지 거울과 비슷해졌습니다. 이것 역시 코로나가 만들어낸 진풍경입니다. 하도 수면이 잔잔하다 보니 백조가 편안히 지나 다닐 수 있고 선박과 부딪힐 확률도 거의 없습니다. 센강은 이따금 화물선만 지나고 있습니다.
유람선이 사라져 수면이 잔잔해진 센강/손진석 특파원
13일에는 에펠탑 건너편을 지나다 인도와 센강 사이의 낮은 돌담 위에 오리 한 마리가 유유자적 걸어다니는 장면을 봤습니다. 이 돌담 위에 오리가 앉아 있는 것 또한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가까이 붙어서 사진을 찍었는데, 별로 피하지 않더군요. 이 돌담 앞에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수많은 관광객이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 오리 차지가 된 거죠. 이달 초 파리 시내 중심부인 루브르박물관 근처에서도 오리들이 시내에서 유유히 걸어다니는 장면이 포착됐습니다.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 앞바다에서는 왜가리 무리가 늘어났고, 돌고래 떼도 평소보다 숫자가 늘었다는 주민들이나 학자들의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에펠탑 건너편 돌담 위를 걷는 오리/손진석 특파원
전례 드문 동물들의 집단 출현에 대해 프랑스 언론은 이동 금지령으로 동물들의 행동 반경에 변화가 생겼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일간 르몽드는 “이동 금지령으로 자연 파괴를 줄인 것이 동물들의 삶이나 생물 다양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물학자 베누아 퐁텐은 “이동 금지령으로 공원의 꽃과 초목이 늘어나면서 삶의 주기가 짧은 곤충들이 가장 큰 이득을 볼 것”이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비행기 운항이 큰 폭으로 줄어들어 소음 공해가 감소한 것이 조류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지난 2일 파리 루브르박물관 근처 도심에 나타난 오리들./AFP 연합뉴스
프랑스뿐 아니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이동 금지령이 내린 이후 코요테가 도심에 나타나 화제가 됐습니다. 다만 우려되는 건 야간에 도심의 불빛이 감소하면서 박쥐의 번식이 활발해질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동 금지령 이후 도심에 동물들이 나타난 것이 ‘착시 효과’일뿐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평소에도 오리를 포함해 동물들이 종종 출현했는데, 갑자기 인적이 사라지니 동물만 눈에 확 들어올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동 금지령인데 저는 어떻게 돌아다닐 수 있었냐구요? 거주지에서 멀지 않으면 한 시간 한도로 운동을 위한 단신 출타는 허용됩니다. 내무부가 정한 서식의 이동 허가증을 작성해 소지해야 하는 조건이 붙습니다. 별도로 저는 프랑스 정부가 발급한 외신 기자증이 있어서 취재를 위한 단신 이동도 가능합니다. 다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섭기 때문에 외출시는 반드시 마스크를 씁니다. 동물 이야기를 하니까 여유로워보일지 모르지만 프랑스는 100만명당 사망자가 229명으로 한국(4명)의 57배에 달합니다. 죽음의 기운이 파리를 감돌고 있습니다. 외국인은 감염될 경우 치료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현지인과 직접적인 대화나 접촉은 요즘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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