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조원 자산가 이회영 선생 일가의 절대 희생과 독립운동

국가의 존재 이유와 길을 말해주고 있다 [양동익 기자 2024-08-15 오전 8:59:12 목요일] a01024100247@gmail.com

 

 

일제강점기, 수많은 지식인과 상류층이 친일파로 변절해 가는 동안 자신의 이익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가진 것을 오롯이 내놓은 삶을 살다 간 이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 가문은 독립운동 명문가로 이름이 높다.

 

유투브 https://www.youtube.com/watch?v=kcNfEkfwTwg




 

우당 이회영 선생은 조선시대 선조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10대손으로, 구한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현재의 서울 명동 일대가 모두 이회영 선생 일가의 땅일 정도로 조선 최고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가 독립운동의 뜻을 품게 된 건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면서다.

 

이에 이회영 선생 일가는 당시 40만 원 정도(1969년 물가기준으로 약 600억 원, 현재 가치로 약 2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모두 비밀리에 처분해 만주로 집단 망명했다. 만주에서 처분한 전 재산을 온전히 최초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 사용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의열단, 한국독립군,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통한다. 1911년 세워진 이후 약 10년간 3,500명의 독립군 장교와 병사들을 양성했으며, 신흥무관학교 출신 다수가 유명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고 광복군의 중심인물로 성장했다.

 

한때 조선에서 당대 최고의 부호로 통했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회영 선생 일가는 정작 베이징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견디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회영 선생은 묵란을 그려 독립 자금을 마련하곤 했는데, 이때 그린 묵란 그림 몇 점이 "난 잎이 칼을 품지 않으면 한낱 풀잎에 지나지 않고, 칼이 난 잎을 품지 못하면 또한 사나운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시와 함께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안타깝게도 1932년 일본군에게 잡힌 이회영 선생은 모진 고문을 당하다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망명 후 35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고 1945년 조국이 해방됐을 때 6형제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성재 이시영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굶어 죽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행방불명 되는 등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이회영 선생의 숭고한 뜻과 정신은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진정한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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